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요즘 핫한 고구려 최대강역 ( 원제 : 사서로 고증한 고구려 최대 강역 )
- 윈터카리나 오래 전 2024.11.06 17:0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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원글 1 : [ #글림킴 ] - AD 7세기, 고구려가 만주에 끼친 영향 - 고구려 천하관(天下觀)
원글 2 : [ #부흥 ] -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, 최대의 승첩: 7. 선택과 집중
원글 3 : [ #에펨코 ] - 사서로 고증한 고구려의 최대 강역.jpg
에 대해, 일찍이 이런 지도가 있다.
과장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고,
실제로 한강 유역은 7세기에 확실히 고구려 땅은 아니었지만,
북부의 경우에는 저게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.
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
『위서』·『북사』·『주서』·『수서』 등 5세기 이후를 다룬 중국의 사서에는
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2,000리·남북 1,000리로 기록되어 있으나,
『구당서』·『구오대사』·『오대회요』 등 당나라 이후의 사서에서는
갑자기 동서 3,100리·남북 2,000리로 크게 증대되어 나타난다.
또한 고구려의 서쪽 경계 역시
『위서』·『북사』·『주서』 등에서는 요동으로 인식되었으나,
『구당서』·『신당서』·『구오대사』·『오대회요』 등에서는
요하를 건너 영주(榮州)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.
그렇다면 이에 근거했을 때 고구려의 세력권은
(당나라의 1리는 약 560m이므로, 3,100리는 1,736km이고 2,000리는 1,120km이다.)
이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게 된다.
이때 남쪽 경계를 하슬라(강릉)로 잡은 것은
3월에, 왕이 하슬라(何瑟羅) 땅이 말갈(靺鞨)에 맞닿아 있으니
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,
경(京)을 폐지하여 주(州)로 삼고 도독(都督)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.
三月, 王以何瑟羅地連靺鞨, 人不能安, 罷京爲州, 置都督以鎭之.
- 『삼국사기』 권5,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5년 -
이 기록에 근거하며
실위를 일부나마 고구려 세력권에 넣은 것은
이다조(李多祚)의 선조는 말갈 추장으로
황두도독(黃頭都督)이라고 불렸는데,
후에 중국에 들어오니 세계(世系)가 요원해졌다.
李多祚, 其先靺鞨酋長, 號黃頭都督, 後入中國, 世系湮遠.
- 『신당서』 권109 이다조열전 -
이 기록의 황두도독이 곧 황두실위 도독이기 때문이다.
(저 도독위를 수여한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.)
그리고 거란은
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
그 무리와 거란병·말갈병을 이끌고 내부하여,
아들 헌성을 보내 (당나라) 조정에 호소하였다.
男生走保國內城, 率其衆與契丹·靺鞨兵內附, 遣子獻誠訴諸朝.
- 『신당서』 권110 천남생열전 -
이 기록에서 고구려 멸망 직전까지 고구려군에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.
반대로 당나라에 동원되는 기록은 660년부터 사라지며
저 연남생의 투항 이후에야 다시 나타난다.
결론적으로 멸망 직전 고구려의 영역은
통념과 달리 이전보다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.
지금까지 '7세기 후반 고구려 영향권'에 대해 알아보았다.
이상 끝.
참고문헌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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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민수, 「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」, 『대구사학』 128, 2017, 143-178.
이민수, 「661~662년 고구려-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」, 『고구려발해연구』 73, 2022, 141-167.
이재성, 「麗唐戰爭과 契丹·奚」, 『중국고중세사연구』 26, 2011, 157-218.
정원주, 「7세기 고구려의 서계(西界) 변화 : 고구려의 요서(遼西) 진출과 당의 대응」, 『영토해양연구』 8, 2014, 154-183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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